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통 칼리파 시대 (문단 편집) == 정치 == 이 시대는 [[선거군주제]] 국가이기도 하다. 애초에 초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에 의해 선출된 [[칼리파]]이다.[* 이는 [[수니파]]의 주장이다. [[시아파]]는 제4대 정통 칼리파이자 무함마드의 유일한 혈족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을 초대 [[이맘]]으로 인정한다.] 그런 만큼 이 시기의 정치 역시 무슬림 공동체 간의 협의와 합의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 다만 [[가톨릭]]의 [[교황]]이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처럼 안정적으로 이어진건 아니다. 실제로 정통 칼리파 시대는 30년도 못가서 제 4대 칼리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알리]]의 암살로 끝나기도 했으려니와 초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가 선출되었을 때부터가 혈통으로 정할지 말지를 놓고, 논쟁이 많았는데 애초 부족사회가 일반적이었던 아라비아 반도에서 탄생한 배경상 안정적으로 선거군주제가 이어지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는데 '''이슬람교에서 예언자는 혈통이 아닌 알라(하느님)의 선택에 달렸다.''' 예언자가 알라의 선택에 달린 만큼 그 후계자인 칼리파 또한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실제로 무함마드의 후계자감으로 여겨지던 알리가 아부 바크르에게 밀려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허나 이런 분위기도 잠시 동안의 일이었으며, 혈연에 따라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무함마드 사후부터 있었다. 정작 처음에는 혈연에 따라 정하지 않았으면서 제2대 칼리파인 [[우마르]] 시대부터는 서서히 이슬람도 세속화되어 그 결과 우마르가 죽기 직전, 주변 인물들이 다음 후계자로 우마르의 아들를 삼을 것을 권해 우마르가 분노하게 된다. 특히 제3대 칼리파인 [[우스만]]이 칼리파가 된 것도 세속화의 상징이다. 우스만은 나름대로 이슬람에서 괜찮은 지위에 있었지만 지위에 비해 무함마드 생전이나 사후에나 이슬람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작았다. 그럼에도 그가 칼리프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슈라#s-1]] 집단이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을 내세운 알리보다 자신들처럼 상류층 출신에 입장이 비슷한 우스만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순수성 VS 세속화 및 칼리파 계승 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은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문제는 이런 식으로 초기 역사에서의 칼리파 계승 방식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까닭에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참 모순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는데 초기 수니파의 주장에 따르면 '굳이 무함마드의 후손이 아니라도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반 세습제)이지만 정작 후대의 수니파 왕조들은 거의 대부분이 세습제였고,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이라크처럼 공화정이 도입된 나라가 생긴것은 거의 근현대에 와서의 일이며,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오직 알리와 그 후손만이!'(=세습제)이지만 정작 현재의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헌법에 마흐디가 강림하면 즉시 그에게 권력을 이양한다는 조항이 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